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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민족단일국가 염원 끝내 무산.. '미완의 건국' 대한민국

[서울신문]류지영 입력 2019.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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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중국에서 돌아온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김구의 거처이자 임정 청사로 쓰였던 서울 경교장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 네 번째가 김구 주석이다.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8월 7일 미국 첩보기관 전략사무국(OSS)과 한미 연합 군사작전을 최종 합의했다. 20일까지 한반도에 침투하기로 하고 출동 명령을 기다렸다. 하지만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임정으로서는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자주독립을 위해 쏟아부은 노력이 물거품이 돼 버려서다.

 

● 임정에 너무나도 아쉬운 해방

김구(1876~1949)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광복군을 국내에 진입시키려고 했다. 영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던 프랑스 샤를 드골(1890~1970)이 레지스탕스 부대를 이끌고 파리에 입성했듯 임정도 광복군을 모아 서울로 들어가려고 했다. 미국 OSS와 한반도 진공을 추진하는 동시에 중국 산시성 옌안에 있던 김두봉(1889~1961)의 조선의용군, 소련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일성(1912~1994)의 항일유격대 등과 손잡고 압록강을 넘어가려고도 했다. 임정이 실제로 미국, 중·소 한인부대와 연계해 대일전쟁을 수행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지금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해방 뒤인 1948년 3월 김구가 안창호(1878~1938) 10주기 추도식 때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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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광시좡족자치구 구이린에 있는 구망일보(救亡日報) 기념관 내부. 1937년 8월 중국인 궈모러(1892~1978)가 상하이에서 창간한 항일신문으로 1939년 1월 구이린에서 복간됐다. 이 신문은 한국광복군 소속 안병무(1912∼1966) 등의 글을 연재하는 등 한중 공동 항일투쟁을 전개했다.구이린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선생이여, 우리 조국이 해방된 것을 10분(100%)으로 보면 7분(70%)은 우리 애국 선열들의 피와 땀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최후의 3분(30%)이 우리 힘으로 되지 못한 까닭에 해방에 기괴한 내용이 담기게 됐습니다.”

 

● 대만, 국제사회 미아 임정 도운 유일한 우방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굳어져 가던 1943년 7월. 임정 수뇌부가 중국 국민당 정부 총통 장제스(1887~1975)를 만났다. 김구 등이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주장해 달라”고 호소했고, 장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해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회담에서 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1874~1965) 영국 총리의 반대를 물리치고 한국의 독립을 약속받았다. 당시 인도의 독립운동가로 훗날 총리가 되는 자와할랄 네루(1889~1964)는 한국을 “아시아 식민지 국가 가운데 열강에게 독립을 보장받은 유일한 나라”라고 부러워했다.

카이로 회담은 1914년 이후 일본이 점령한 영토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려고 모인 자리였다.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된 한국은 논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장제스가 예외 조항까지 만들어 한국을 도왔다. 1932년 4월 윤봉길(1908~1932)의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로 우리 민족의 항일 의지를 높이 샀기 때문이다. 중국 국민당 정부(현 대만)는 당시 국제사회에서 ‘미아’가 될 뻔한 임정을 마지막까지 지켜준 유일한 친구였다.

하지만 장제스의 노력에도 미국과 영국, 소련 등 열강의 반응은 차가웠다. 일본 패망 뒤 임정을 한반도의 정식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한국의 독립과 임정의 승인은 별개다.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이 분열돼 임정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다. 임정은 한반도와도 연계가 없다. 중국이 임정을 승인하면 소련도 친소단체를 승인할텐데 이렇게 되면 연합국 내에서 마찰이 생겨날 수 있다.”

처칠도 임정을 인정하면 인도 등 영국 식민지들이 동요할 수 있다고 보고 반대했다. 결국 임시정부는 정부 자격을 부여받지 못했다. 독립운동가들도 개인 자격으로 한국에 돌아와야 했다. 1945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임정 직원과 가족들이 차례로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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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3월 김구(왼쪽)가 친일파 출신 한민당 수석총무 장덕수(1894~1947) 살해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미 군정 군사법원에서 증언하는 모습. 검사가 직업을 묻자 그는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라고 답했다.서울신문 DB

 

● 임정, 국제정세 못 읽고 패착…한독당 소멸

임정 인사들이 귀국하자 시민들은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김구의 거처이자 임정 청사 역할을 한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에도 인파가 몰렸다. 1945년 12월 임정 인사들은 서울운동장(현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환영회에 참석했다. 15만명이 몰려와 이들의 귀환을 축하했다. 하지만 미 군정은 자신 이외의 어떠한 정부 활동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임정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때부터 김구는 미 군정 규정을 어기고 임정을 사실상의 정부로 간주하려고 해 갈등을 빚었다.

직접적 도화선은 신탁통치 문제였다. 1945년 12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개국 외상이 만나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의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임정은 즉각 국무회의를 열고 반탁운동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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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임정은 1943년 영국과 미국이 한국을 국제 공동관리하는 방안을 논의했다는 뉴스가 나오자 충칭에서 ‘재중자유한인대회’를 열어 반대운동을 펼쳤다. 임정 연구의 권위자인 한시준(65)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해방 뒤 임정의 반탁운동은 충칭에서 국제 공동관리에 반대했던 연장선상에 있던 것”이라며 “일제가 패망하면 한국은 곧바로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 임정의 확고부동한 믿음이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김용옥(71) 한신대 석좌교수는 “당시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논의한 신탁통치안은 (임정이) 반대할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미소 공동위원회는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방안을 내놨다”며 “당시 전 국민이 일치단결해 신탁통치를 찬성했어야 했다. 그러면 분단도 일어나지 않았고 1948년 제주 4·3사건과 여순 민중항쟁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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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중국에서 돌아온 김구(가운데)가 이승만(왼쪽)의 주선으로 미 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 중장을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이승만의 삶과 꿈’ 제공

 

● 美군정, 비밀리에 임정 해체공작까지

임정은 1945년 12월 31일 ‘국자 1·2호’라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신탁통치를 강행하려는 미 군정 대신 자신들이 정부 역할을 맡겠다는 것이었다. 1946년 1월 1일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1893~1963)가 김구와 언성을 높여 싸워 상황을 수습했다. 그러나 미 군정은 이때부터 임정을 위험한 존재로 보고 협력 대상에서 배제했다. 비밀리에 해체 공작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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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가 열리는 평양에 가기 위해 백범 일행이 38선을 넘기 전 기념촬영한 모습. 왼쪽부터 비서 선우진, 김구, 아들 김신.서울신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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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회의장인 모란봉 극장으로 걸어가는 김일성(왼쪽)과 김구. 남북연석회의는 1947년 9월 한반도 독립 방안을 논의하던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민족의 영구 분단 위기를 극복하고자 추진됐다.‘조선의 오늘’ 제공

 

이후 김구의 정치적 시도는 번번이 무산됐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실시돼 8월 15일 단독정부가 세워졌다. 9월 9일 북한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38선을 경계로 국토와 민족이 갈라졌다. 임정 세력이 주축이던 한국독립당은 “남한만의 정부 수립에 반대한다”며 총선 참여를 거부했다. 제헌의회에서 정치권력을 얻지못한 한독당은 세를 잃고 와해됐다. 당시 국제 정세와 한국사회 분위기를 제대로 보지 못한 ‘정치적 패착’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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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회의장으로 향하는 민족대표들. 왼쪽부터 김두봉, 박헌영, 김원봉, 김달현, 김일성.서울신문 DB

 

● 주요 임정 지도자들 어두운 말로

주요 임정 지도자들의 말로도 암울했다. 1947년 7월 좌우 합작운동을 펼치던 여운형(1886~1947)이 살해됐다. 김원봉(1898~1958)은 친일경찰 노덕술(1899~1968)에게 고문을 받은 뒤 월북했다. 그가 자신의 비서였던 중국인 학자 쓰마로(100·미국 거주)에게 보낸 편지에는 “북조선은 그리 가고 싶은 곳은 아니다. 하지만 남한 정세가 너무 나쁘고 (일부 우익들이) 나를 (살해하려고) 위협해 살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

한국전쟁을 1년 앞둔 1949년 6월 김구도 안두희(1917~1996)의 총탄에 스러졌다. 그의 나이 73세였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했던가. 1919년 마흔이 넘은 나이에 “임정 문지기라도 하겠다”고 상하이로 찾아가 명망가들이 떠난 자리를 끝까지 지킨 그였다. 임정을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되살리는 데 누구보다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민족단일국가를 바라던 그의 염원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미완의 건국’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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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장면.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새 정부의 연호를 ‘대한민국 30년’이라고 밝혀 대한민국의 시작이 상하이 임시정부가 세워진 1919년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서울역사편찬원 제공

 

● ‘1919년 임정이 대한민국의 시작’ 분명히

그렇다고 임정이 우리 역사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1948년 7월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1875~1965)은 취임 직후 ‘대한민국 30년’이라는 연호를 썼다. 상하이 임정이 시작된 1919년을 대한민국의 시작으로 보고 이를 계승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뉴라이트 등은 “대한민국이 1948년 건국됐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대한민국은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이 아니라) 미국의 도움으로 세워진 나라’라는 속내가 있다. 하지만 이들이 ‘건국의 아버지’로 여기는 이승만조차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초대 내각 16명 가운데 자신을 포함한 5명을 임정 요인으로 채웠다.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1868~1953), 국회의장 신익희(1892~1956), 국무총리·국방부장관 이범석(1900~1972), 무임소장관 이청천(1888~1957) 등이다. 당시 정부도 한국 독립을 위한 임정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87년 국회는 ‘6월 항쟁’으로 얻어낸 9차 개헌을 통해 대한민국의 법통이 임시정부에 있음을 다시 한번 천명했다.

어떤 이들은 연합국이 해방을 가져다 줬다고 말한다. 한국이 독자적으로 일제를 이기지 못했고 연합국도 임정의 독립운동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 제패를 꿈꾸던 일본을 혼자 힘으로 막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의 노력을 폄하할 이유는 없다. 또 연합국이 임정을 승인하지 않은 배경에는 일본 패망 뒤 전리품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정치적 의도도 담겨 있다. 그들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전 세계에서 어느 나라보다도 가장 오래 그리고 치열하게 일제와 맞서 싸웠다. 우리 민족의 해방은 거져 얻어진 것이 아니다. 임정이 중심이 된 독립운동세력의 길고 지난한 투쟁과 희생의 산물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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