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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신의 아이콘, 신숙주

1456년(세조2년) 6월2일. 세조와 세자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고자 했던 사육신의 계획이 발각된 저녁 집으로 돌아온 신숙주는 두어 자 되는 베를 손에 쥐고 홀로 다락 대들보 밑에 앉아 있는 부인을 발견했다. “평소 성삼문 등과 형제보다도 더 두터운 친교를 맺으셨기에 오늘 옥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당신이 죽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저도 자결하려 하던 참입니다. 그런데 당신께서 어째서 혼자 살아 돌아오신 것입니까?” 신숙주는 말문이 막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널리 알려진 이 장면은 완벽한 허구다. 신숙주의 부인은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기 전, 신숙주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당시에 병으로 죽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잘못된 사실이 수백 년이 지나도록 진실처럼 믿어져 왔을까. 왜 백성들은 녹두나물이 잘 쉬기 때문에 ‘숙주’나물이라고 부른다는 등 그를 변절의 대명사로 꼽았을까.

 

◆ 탁월했던, 너무나 탁월했던…

신숙주는 세종의 재위기간 동안에는 집현전 부수찬, 응교, 직제학을 지내는 등 주로 집현전 학사로 활동한다. 이때 일본에 다녀온 후에 일본의 역사와 지리, 정세, 대일 교류의 역사, 사신 왕래 절차 등을 집약한 <해동제국기>를 저술한다. “국교를 맺어 서로 예방하며 풍습이 다른 나라를 어루만지고 접촉하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먼저 그 정세를 알아야 예를 다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지은 이 책은 조선과 일본을 막론하고 후대에까지 높은 평가를 받았다.

 

훈민정음 창제에도 깊이 관여한다. 음운학과 어학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 <홍무정운>의 한글주석서와 <동국정운>의 책임 편찬을 맡았으며 중국어, 일본어, 몽고어, 여진어를 비롯한 각국의 언어에 능통해서 통번역도 자유자재로 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문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단종은 불과 열두 살의 어린나이였다. 그래서 김종서, 황보인 등 재상들이 대신 국정을 책임지고 주도하게 된다. 이 정국은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으로 인해 끝나게 되는데 신숙주도 이때 정난공신 2등에 책봉됐다. 이어 세조 1년에는 세조 등극에 세운 공을 인정받아 좌익 1등 공신에 봉해진다. 이때 1등 공신이 된 사람 중 세조의 친인척을 제외하면 권남, 신숙주, 한명회 세 사람이 남는다. 이 셋이 바로 세조의 핵심 측근이며 세조의 시대를 만들어간 주역들이다.

 

세조가 죽은 후에도 신숙주는 원상이 돼 예종의 국정을 자문했고 성종이 즉위하자 다시 영의정으로 제수돼 4년 가까이 재임했다. 이때 예조판서를 오랫동안 겸임했던 것이 특이하다. 영의정이 실무부처 장관인 판서를 겸임하는 일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찾아볼 수 없는데 외교와 학문에 관한 그의 탁월한 경륜 때문으로 생각된다.

 

◆ 세조와의 미묘한 관계

이러한 신숙주의 화려한 이력은 세조의 전폭적인 지지 때문에 가능했다. 세조는 “영의정이 신숙주같이 현량한 인재를 찾아 천거할 수 있겠는가?” “내가 신숙주의 어짊을 알아보고 뽑아 써서 이렇게 됐으니 나에게 인재를 알아보는 밝음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라며 공개적으로 신숙주를 인재의 대명사로 꼽았다.

 

물론 신숙주는 이러한 평가를 받을 만한 재상이었다. 게다가 세조의 권위까지 높여줄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정통성이 부족했던 세조에게 ‘신숙주 같은 이가 지지한 사람이라면 세조도 괜찮은 임금감이 아닐까?’ 라는 당시 사람들의 인식은 큰 힘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록에 나타난 세조의 거듭된 칭찬과 선물공세는 조금은 이상해 보인다.

 

세조가 신숙주를 완전히 믿지 않았다는 것은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을 때 단적으로 드러났다. 이시애는 반란을 일으키면서 조정에 혼란을 가져다줄 목적으로 신숙주와 한명회 등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어디까지나 허위였지만 세조는 두 사람을 의심해 신숙주를 옥에 가두고 병석에 있던 한명회를 연금시켰다. 심지어 신숙주가 차고 있던 형구를 다소 헐겁게 해 준 담당 관리를 처형하기까지 한다.

 

◆ 직언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펼치는 재주

이런 군주 밑에서 신숙주의 행동은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선비의 의무라고 할 수 있는 ‘직언’을 꺼렸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자신의 학문을 자랑하지 않았다. 한번은 세조가 문건을 주고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라고 하자 그는 침묵했다. 그러자 세조는 “이(耳)자가 잘못됐는데 어찌 경은 알지 못하냐”며 벌주를 내렸다고 한다. 세조가 머리를 써서 신숙주를 골탕 먹였을 때도 그는 속아 넘어갔다. 이에 세조는 “지혜로운 자가 천 번 생각하더라도 반드시 한 번 실수는 있는 법이다. 경이 지금 나에게 속았다”고 말하며 즐거워한다. 신숙주는 아마도 글의 잘못된 부분을 알고 있었고 세조가 그를 속이려고 한다는 것도 눈치 챘을 것이다. 하지만 모른척함으로써 세조가 자신보다 뛰어난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준 것이다.

 

이와 함께 신숙주는 대체가 불가능한 자신만의 영역을 확고히 구축했다. 바로 외교와 안보 분야다. 세종 때 일본을 방문하고 김종서의 휘하에서 북방 개척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이 분야의 전문가로 자리매김했다. 세조는 외교 안보와 관련된 사안은 반드시 신숙주와 논의하고 결정했는데 중국 사신이 오는 일로 함길도 도체찰사로 근무하고 있던 신숙주를 급히 상경시키고 충청도에 파견돼 있던 그를 “지금 사은사 이극감이 가지고 갈 문서를 경과 더불어 완성하려고 하니 배를 타고 급히 올라오라”고 지시한 적도 있다.

 

신숙주는 이러한 처신 속에서 자신이 꿈꿨던 개혁과제들을 실천해 갔다. 그는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은 것은 인(仁)이요, 법을 어기지 않는 것은 의(義)요, 태만하지 않는 것은 근(勤)이요, 과감한 것은 민(敏)이다. 인의를 지키고 근민하게 행동하면 장차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라며 아직 완전히 구축되지 못한 조선의 법과 제도의 빈틈을 보완하고 시행규칙들을 정비했다. 그는 시스템의 개선을 통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경세이론과 제안들은 ‘개선을 통한 완성’에 맞춰져 있었는데 그 개선은 시스템 도입의 취지를 성찰해 근본적인 문제를 바로잡는 것으로 이뤄진다.

 

그렇다면 신숙주는 단종 밑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쳐 보일 수는 없었을까? 이후 신숙주의 행적으로 볼 때 그가 세조를 선택한 것이 권력이나 부귀를 탐해서가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왕조의 기틀이 완성되지 않은 그때, 조선의 미래를 이끌어갈 임금으로서 단종보다는 세조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그래서 변절자라는 비난이 쏟아질 것을 알면서도 세조를 선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선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많은 경우 우리는 도덕적으로 의심스럽거나 위험한 수단을 택하지 않을 수 없으며 부작용이 수반될 가능성 또는 개연성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막스 베버의 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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